목회칼럼 김범수 목사 워싱턴동산교회(MD) 눈먼 파우스트와 눈뜬 바디매오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 늘 욕망으로 불타오른다. 그 욕망은 자신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해를 입히게 되고, 이 세상을 타락시킬 수 있는 아주 위험하기 그지 없는 악한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괴테가 지은 ‘파우스트’의 주인공 파우스트는 악한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끌려 욕망의 깊은 바다에 빠지게 된다. 파우스트는 삶의 회의와 지겨움, 그리고 아쉬움을 해결하고자 술과 쾌락, 돈, 권세, 명예, 권력, 힘, 그리고 세상에 제일 아름다운 여자와 살았다. 눈으로 보이던 모든 것들이 다 욕망과 욕심의 덩어리였는데 나이들어 눈이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자 드디어 지나온 세월들과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삶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 진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다 이루고 가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도 파우스트를 능가할 정도로 얼마나 많은 욕망의 산을 오르며,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가? 세상을 뒤흔들고 싶은 권력, 술에 취해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숨기고 싶은 충동,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크레오파트라나 양귀비 같은 여인과 단 하루라도 살고 싶은 유혹, 내가 걷고 달려가서 머무는 모든 땅이 다 내 것이면 좋겠다는 욕심을 하루에도 얼마나 하는가? 그런데 결국 우리도 지금에 와서야 알아야만 하고, 또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두 다리 쭉 뻗고, 양팔을 벌리고, 따뜻한 방이든지, 태양이 내리쬐는 모래사장이나 새소리 울리는 숲속 그늘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영혼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없고, 어느새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내 영혼 옆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파우스트를 저주하기보다는 파우스트와 껴안고 같이 울어야 한다. 우리의 인간성을 꾸짖고, 참회해야 한다. 지금까지 잘못한 그 모든 생각과 행동의 자취와 흔적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토로하고, 참신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충분히 성경에 나오는 바디매오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바디매오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욕심을 가질 수 없었고, 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소망과 꿈도 가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에게 욕망이라고 해보아야 오직 눈뜨는 것이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아픈 사람들을 고쳐준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지나기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아이가 놀라서 울 정도로 소리를 쳤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소리를 들은 예수님은 그에게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 네 소원이 무엇이냐?" 소경은 대답했다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세상에 원하는 것이 오직 앞을 보는 것이었다. 이미 우리는 앞을 보고 사는데 바디매오는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것만이 그의 소원이었다. 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서 여러 가지 욕망의 더미에 파묻히며 사는 우리로서는 미안할 정도이다. 파우스트가 바디메오 앞에 와서 무릎 꿇고 미안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파우스트나 바디매오나 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많은 것을 바라기보다는 있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다. |